2004년 11월 05일

한말에 있었던 일화 한 토막이다. 영국 빅토리아 여왕 즉위 60주년 축하식에 특명전권대사로 참여했던 민영환선생이 여왕에게 접견을 청했다. 도포에 갓 쓴 조선 선비를 만난다는 생각에 자못 기대를 걸고 있었던 여왕은 비서로부터 양복정장을 한 민영환의 면모를 전해 듣고 얼마나 실망이 컸던지 그만 알현 요청을 취소시켜 버리고 말았다고 한다.
시대적 상황과 배경의 차이가 있긴 하지만, 외국인들은 자국의 문화와 다른 이국적인 특색의 문화를 얼마나 보고싶어 하는가를 알 수 있으며, 한국적인 것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절실히 느끼게 하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세계 수많은 나라 중에 오랜 역사와 함께 독특한 자기만의 색깔, 곧 전통문화를 가진 나라가 문화선진국으로 부상하고 있다. 그런데도 요즘 우리 전통문화는 정체성을 잃고 흔들리고 있다.
물론 자기 것만 고집하는 편애한 사고도 옳지 않지만, 뿌리를 버리고서는 견고하게 설 수 없다. 한국적인 것에 서구 선진문화를 덧씌운다 해서 그것이 우리의 색깔을 내는 전통문화가 될 수 있을까? 또 외국 관광객들이 절름발이 문화상품을 보고자 우리나라를 찾겠는가. 어떻게 하면 우리 문화를 최상의 상품화하여 내놓을 것인가 연구해야 할 문제이고, 그것을 지나치게 어렵게 생각하거나 또는 서둘러서도 안 된다.

문화수도 판짜기를 보자. 우리는 하드적인 것에만 목을 메고 중요한 소프트적인 것을 소홀히 하지 않나 생각해 보아야 한다. 거대하고 그럴싸한 건물을 세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를 향유하고 즐기는 저변의 자발적인 참여가 필수적이다.
문화수도란 건축물과 같은 하드웨어가 갖춰졌다 해서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문화도시의 시민으로서 모든 행위에 있어 문화인다운 모습을 보여줄 때 문화수도가 되는 것이다. 때문에 문화수도 건설을 위해서는 우선 백년대계를 가지고 시민들의 문화의식 향상을 위해 부단한 교양교육과 콘텐츠 분야에 투자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문화를 `굴뚝 없는 산업' 이라 했다. 자연 자원을 활용하여 외화를 벌어들인다는 말일게다. 오늘날 세계가 하루 생활권이 되고 보니 문화의 관광 상품화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서 경제적 중요성이 부각되고 있다. 국지적으로 볼 때 특히 그 지역의 관광 상품에 있어 그 지역만이 보존하고 있는 독특한 문화적 기반은 외부 투자유치 촉진과 관광 수입에 무한한 부가가치가 있는 중요한 소재이다.
특히 우리 고장의 경우 한국인이 가장 좋아한다는 전라도 음식이 있다. 얼마 전 인터넷 판매 1위 김치가 전남 순천김치였다는 보도가 있었다. 김치는 이미 맛뿐 아니라 영양, 건강 등 많은 측면에서 서구인들의 입맛을 사로잡아 가고 있는 한국의 대표음식 중 하나이다. 물론 김치의 세계화에 대한 연구는 진행 중으로 안다. 그런데 중국김치 수입이 크게 늘고 있는가 하면 일본 기무치가 세계 시장을 누빈다. 일본, 중국과 같은 이웃나라가 김치 연구를 통해 우리 것보다 더 맛있는 김치를 만들어내 세계 시장을 공략한다면 우리는 순식간에 적기를 놓치게 된다. 세계인들에게 아직 각인이 돼 있지 않은 상황에서 한, 일, 중 세 나라는 비슷하게 보이는 것이 서구인들의 시각이기 때문이다.
코리아를 알게 하는 것, 느끼게 하고 맛보게 하는 것, 그렇게 하나라도 그들에게 각인이 된 우리만의 그 무엇이 그들에게 다가가야만이 문화가 빛을 발하고 그것이 관광상품으로 개발될 수 있는 것이다.
한국에 관심을 갖고 일부러 찾아오는 외국 관광객들은 무엇을 보고자 오는 것일까? 그것은 한국만의 특징이 살아 숨쉬는 문화를 찾아서일 것이다. `우리 것은 좋은 것이여' 라는 이 말은 우리 색깔의 전통 문화상품으로서의 특징을 뜻한 것이 아닐까. 순수문화예술이나 창작이나 환경 분야도 좋다. 그러나 모든 것은 전통문화의 몰이해와 단절 속에서는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다. 문화예술 속에 전통의 혼이 담겨 있을 때 진가를 발휘하게 된다.
문화도시는 하루아침에 이룩되는 것이 아니다. 더더구나 문화를 경제적 가치로 환원한다는 문화산업 육성 또한 결코 단시일 내에 이뤄질 수 없다. 오랜 세월동안 우리가 살아왔던 이 고장이 간직하고 있는 멋과 맛을 훼손하지 않고 그 가치를 오롯이 담아 정성스럽게 내보일 때 경제적 가치로 보답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내가 살고 있는 주변의 문화부터 관심을 가져야 될 일이다. 그렇게 해서 우리 것에 대한 자긍심을 먼저 가져야만이 만들어내는 문화상품 역시 세계인들이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가치와 품격을 지닐 수 있게 된다.
문화상품은 공장을 지어 찍어내는 획일적인 산물이 결코 아니다. 국가나 민족, 종교를 넘어 누구에게나 공통의 울림으로 다가가 감동을 줄 수 있는 유일무이한 종합상품이 바로 문화인 것이다.

조상열 (사) 대동문화 회장(호남대 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