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일보
(칼럼)/전일시론/문화도시 만들기 대화가 필요하다


박 윤 모(광주연극협회장.문학박사)
 

황희(黃喜) 정승과 당시 공조판서였던 김종서(金宗瑞)의 유명한 이야기가 있다. 김종서는 천성이 뻣뻣하여 그 태도가 자못 거만하였다. 나중에 북쪽의 야인(野人)들을 정복하고 두만강 북쪽으로 강역을 넓혀 `백두산 호랑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는 문관이었으니, 그 천성을 짐작할 수 있겠다.
 하루는 황희 정승이 하급 관리를 불러 말했다. “김종서 대감이 앉은 의자의 한 쪽 다리가 짧은 모양이니 고쳐 오너라." 그 한 마디에 김종서는 정신이 번쩍 들어 사죄하였다. 후에 김종서 장군은 이렇게 술회한다. “내가 육진(六鎭)에서 여진족과 싸울 때 화살이 빗발처럼 날아오는 속에서도 조금도 두려운 줄을 몰랐는데, 그 때 황희 대감의 말씀을 듣고는 몰래 등 뒤에서 식은땀이 흘렀네."
 큰 목소리로 질타하는 말보다 은근히 돌려 말하는 이 한 마디가 가진 위력을 알 수 있다. 황희 정승이나 김종서 장군이 서로 상대의 말을 받아들이고 그것에서 말의 진정한 뜻을 발견하려는 자세가 되어있지 않았다면, 이 일화는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짐작이 가능하다. 이 일화에서는 그 점이 더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요즘은 어딜 가나 고함치듯 목소리 높은 대화만 있다. 아예 대화 수준을 넘어서 일방적인 성토나 자기주장만 있다. 집단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때와 장소가 따로 없다. 노조들의 파업도 그렇고, NEIS 문제도 그렇고, 핵폐기장 건설 문제도 그렇다. 대화와 타협과 공감으로 서로의 문제를 살펴보고, 그 정확한 말뜻을 헤아리고, 그 마음을 들여다보려는 자세가 없으니 목소리가 커진다. 서로 함부로 말하고 약점을 들추고 인신공격한다. 명분도 없이 반대하고 `반대를 위한 반대'만 난무하니 불신밖에 남는 것이 없다. 이러니 화합과 공존이 무람하다. 정신적인 풍요로움을 느낄 수 없는 사회가 되어가고 있다.
 문화수도 논의도 그런 시각에서 거론이 가능하다. 광주시는 그동안 대통령의 문화수도에 대한 언급에 일희일비하면서 많은 발상의 정책들을 내놓고 또 내놓을 작정이다.
 시가 의욕을 가지고 문화수도 문제를 다루려는 것은 당연지사다. 그러나 이 의욕이 과욕이 되거나 자기만의 욕심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문화의 문제는 더욱 그렇다. 문화는 누구만의 전유물도 아니고, 하루아침에 그 저변을 바꿀 수도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광주시는 현재 시 차원의 미래지향적이고 생산적인 복합문화센터 건립을 구상하고 있으며, 문화수도 지원 조례 만들기에 주력하고 있다. 문화수도 조례안 마련을 위한 공청회도 열고, '문화수도육성추진기획단'도 운영하며 실질적인 문화수도 정책 개발에 힘쓰고 있다.
 그런데 시민들의 절반이 '문화수도'라는 용어 자체에 대해 모르고 있다는 최근의 조사 결과는 광주시가 얼마나 이 논의에서 시민들을 배제하고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일부 시민단체들은 `문화수도'와 관련된 모든 행정에서 민간의 목소리가 빠져있어 관 주도로 이루어지고 있지는 않은지 우려하고 있다. 공청회도 토론회도 모두 행정의 편의대로 일부의 의견만을 수렴하는 장이 되고 있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광주시민의 절반이 문화수도 육성에 대해 모른다고 답한 최근의 조사 자료에서도 이런 우려는 반영되어 있다.
 늘 시민들이 소외되는 행정에서 문화는 꽃필 수 없다. 지금껏 문화와 예술을 창조하고 향유한 것은 시민들이지 자치단체가 아니다. 그런 점에서 문화 관련 현장 예술가들과 시민의 목소리를 `문화수도' 논의에 포함시키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라고 할 수 있다.
 황희 정승의 낮은 목소리에 담긴 `뼈아픈 지적'을 뼈아프게 알아들은 김종서 장군의 마음이 그립다. 여유와 포용력이 없이는 문화 정책 자체가 허사이고 거짓이다. 문화는 다양한 목소리의 화합과 여유로운 수용에서 출발되는 것이기 때문이다.